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괴수의 실루엣 ⓒ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괴상하다 [형용사] 마땅한 도리나 이치에 벗어나 있다
괴물 [명사] 괴상하게 생긴 물체 /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스포츠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를 흔히 괴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방망이를 휘두를 때나 공을 냅다 던질 때, 그라운드를 성큼성큼 뛰는 모습 하나 하나에서 '야수성'이 느껴지며 이름마저도 흡혈귀스러운 블라디미르 게레로(31·LA 에인절스)에게는 괴물보다 괴수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시즌 초반 알렉스 로드리게스(31·뉴욕 양키스)가 만들어낸 돌풍에 잠시 가려지기도 했지만, 현재 게레로는 MVP를 따낸 2004년(.337/.391/.598 39홈런 126타점) 이후 최고의 시즌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14일(한국시간) 현재 게레로는 리그에서 타율 4위-출루율 1위-장타율 2위-OPS 1위를 질주하고 있으며, 홈런과 타점에서도 3위에 올라있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장타력의 회복이다. 2004년까지 통산 .589를 유지했던 게레로의 장타율은 지난해 풀타임 데뷔 후 가장 낮은 .552까지 떨어진 바 있다.

기세가 한풀 꺾이며 지난 18경기서 타율 .246 1홈런(2루타2) 5타점에 그친 로드리게스와의 차이도 많이 좁혔다. 같은 기간 게레로는 타율 .323 4홈런(2루타8) 17타점을 기록했다. 현재 게레로는 로드리게스, 매글리오 오도네스(디트로이트) 데이빗 오티스(보스턴)와 함께 아메리칸리그 MVP에 가장 접근해 있는 1명이다.


첫 36경기에서 .306/.363/.545였던 2005년 .324/.351/.518였던 지난해에 비하면 예사롭지 않은 출발이다. 하지만 게레로의 성적은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있었다. 데뷔 이후 가장 극심한 견제를 올시즌에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시즌 게레로가 득점권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것은 53번. 하지만 이 중 12번을 고의볼넷으로 잃었다. 그럼에도 게레로는 득점권에서 .371/.547/.629로 분전하며 22타점을 올렸다. 1루 상황까지 포함하면 .397/.526/.724로 더 공포스럽다.

반면 로드리게스가 47번의 득점권 상황에서 얻은 고의볼넷은 단 1개다(득점권 성적 .316/.404/.737). 그의 다음 타석에 제이슨 지암비라는 '걸리면 넘어가는' 타자가 버티고 있으며, 9번까지 내려가야 숨돌릴 만한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올시즌 게레로는 배리 본즈(14개) 다음으로 많은 12개의 고의볼넷을 얻어내고 있다. 현재 추세라면 51개를 기록, 개인 최고기록인 2002년의 32개를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120개-68개-61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를 제외하면 한 시즌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게 된다.

게레로가 맡고 있는 에인절스 3번 타순의 OPS(.982)는 보스턴 레드삭스(1.023)에 이은 리그 2위이지만, 4번은 리치 섹슨이 극심한 부진(.183/.282/.391)을 겪고 있는 시애틀 매리너스(.737)보다 약간 나은 리그 9위에 (.759)에 불과하다. 반면 양키스 5번의 OPS는 리그 5위권인 (.829)에 달한다(13일 현재).

올해 에인절스는 게레로가 고의볼넷을 얻은 8경기에서 6승2패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게레로가 고의볼넷으로 출루한 후 다음 타자의 성적은 3번의 희생플라이를 제외하면 9타수1안타 3타점에 불과하다. 상대 팀들의 '괴수 피하고 보기 작전'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게레로는 1998년 팀의 중심타자가 된 이후 한 번도 후속타자의 화끈한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브래드 풀머, 리 스티븐스, 올랜도 카브레라 등은 그리 강력한 타자들이 아니었으며, 호세 비드로는 주로 게레로의 앞에 나서 '게레로 효과'를 본 선수였다.

에인절스 입단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붙박이 4번'인 개럿 앤더슨은 게레로 입단과 동시에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이에 게레로는 얼마전 현역선수로는 3번째이자 역대 10번째로 통산 200개의 고의볼넷을 얻어냈다. 이 분야에서 신적인 존재인 본즈를 제외하면 고의볼넷당 타석수는 단연 1위다(13일 현재).


고의볼넷 랭킹에서 역대 15위 내에 오른 선수 중 아직 현역인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 게레로를 제외한 12명 중 11명(행크 애런, 윌리 매코비, 조지 브렛, 윌리 스타겔, 에디 머레이, 프랭크 로빈슨, 토니 그윈, 마이크 슈미트, 어니 뱅크스 윌리 메이스, 칼 야스트렘스키)은 모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들이다.

이에 비해 메이저리그 데뷔 후 그리피, 에드가 마르티네스, 라파엘 팔메이로, 개리 셰필드 등의 명예의 전당급 타자들이 뒤를 받춰준 로드리게스가 통산 7932타석에서 얻은 고의볼넷수는 게레로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는 60개에 불과하다(132타석당 1개).

이대로 가면 게레로는 293개로 역대 2위에 올라 있는 애런을 제치게 될지도 모른다. 본즈를 제외하면 고의볼넷이 집계된 1955년 이후 가장 집중적인 견제를 많이 받고 있는 타자가 바로 게레로다.

에인절스 빌 스톤맨 단장이 주는 의문은 넉넉한 트레이드 카드와 현금을 가지고 있음에도 몇 년째 게레로를 도와줄 타자를 영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05시즌 중반 본즈가 2006년에 에이절스로 이적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아 팬들을 설레게도 했지만 말 그대로 루머로 끝났다.

올해도 에인절스는 지난 3년과 마찬가지로 앤더슨에게 4번을 맡기고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앤더슨은 .263/.265/.389라는 최악의 출발을 한 후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지난해 눈을 뜬 후안 리베라까지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있어 최근에는 1번타자로 영입했지만 팀에서 게레로 다음으로 좋은 장타력을 보이고 있는 개리 매튜스 주니어(.303/.352/.490)를 게레로 다음 4번 타순에 내보내고 있다.

그나마 앤더슨을 대신해 좌익수로 나서고 있는 레지 윌리츠(25)의 눈부신 활약(.359/.432/.397) 덕분에 가능한 것이지만 매튜스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최근 에인절스는 풍성한 팜을 활용하기 위해 내부 충원을 최우선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게레로의 파트너 영입만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올시즌 후에 열리게 되는 FA시장에는 장타력이 좋은 선수들이 제법 나온다. 앤드류 존스, 토리 헌터(중견수) 애덤 던(1루수) 마이크 로웰(3루수) 호르헤 포사다(포수)와 함께 알렉스 로드리게스도 FA를 선언할 수 있다. 에인절스는 로드리게스가 FA시장에 나서게 될 경우 가장 유력한 행선지 중 하나로 꼽히는 팀이다.

게레로가 7년을 보낸 몬트리올의 올림픽스타디움은 우타자가 홈런을 뽑아내기에 쉽지 않은 구장이었다. 게레로는 2002년 심판의 오심 때문에 40홈런-40도루의 대기록을 놓쳤다. 2003년의 허리 부상만 아니었다면 올해 10년 연속 30홈런-100타점으로 로드리게스, 라미레스와 함께 역대 2위에 오름은 물론, 10년 연속 3할-30홈런-100타점의 역대 최고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스톤맨 단장의 다음 임무는 하루라도 빨리 외로운 괴수의 짝을 찾아주는 것이다. 목표가 월드시리즈 우승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