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전에 TV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을 봤다. 서울고와 광주일고의 한판 대결.

하지만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라 마지막 회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9회말 투아웃부터.

이쯤 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내가 본 야구는 야구의 순정을 불러

낼 만큼 근사했다.

서울고의 에이스 이형종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침울해 보였고, 눈빛

은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반면, 타석에 들어선 광주일고의 타자는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승부처에서 캐스터와 해설자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현재 스코어 9:8로 서울고가 앞선 가운데, 9회말 투아웃 주자 1,3루 상황 광주일고의 마지막

공격.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격언이 자꾸 인용됐고, 긴장이 흥미진진으로 변해가는

현장이었다.

투수 이형종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웃카운트 하나만 추가하면, 대통령배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칠대로 지쳤고, 뒤는 없었다. 서울고 감독의 얼굴도 가끔 화면에

비쳤지만, 불펜은 텅 비어 있었다. 이기든 지든, 여기가 끝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육신은 마음대로 되지 않은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것도 마운드 위에서.

그런 상황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이형종처럼 표현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물어서 이채

로웠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그의 투구수를 점검하다가, "벌써 130개의 공을 던지고 있네요."

라고 의뭉스럽게 말했다. 말하자면, 오늘도 고교 투수는 혹사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스는 결승전까지 오면서 체력이 바닥나는 법이다. 그런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신문에서는 또 일과성의 문책 기사를 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울지

않는다. 얼굴을 찌푸릴지언정, 소년은 울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이형종은 어땠을까. 광주일고 4번 타자가 휘두른 공은 빗맞았는지 멀리 가지 못했다. 

2루수 키를 넘기는 행운의 안타였지만, 3루 주자가 들어오기에는 충분했다. 9:9 동점.

이렇게 되자, 이형종은 눈에 띄게 울상으로 변해갔다. 그는 신체의 한계와 싸우면서 광주

일고와 맞서고 있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아, 투수 울고 있네요. 울면서 던지네요." 라고

말했다. 그런 발언에는 전혀 비아냥이 없었지만, 역시 얄미웠다.

이형종은 곧 울음보를 놓을 듯했다. 우는 표정으로 던지고 있었기에 카메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다가가는 무례를 범했다. 눈물의 순간을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들먹들먹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HD의 물질은 흐르지 않았다. 캐스터와 해설자도 그라운드

의 한 모서리를 점하고 있었으니, 실제로 보고 하는 말이었겠지만. 어쨌든 이미 속으로 무너

지고 있던 투수는 다음 순간 몸에 맞는 볼로 만루를 자초했고, 끝내 역전 결승타를 내주고

말았다.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광주일고 선수들이 한꺼번에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우승의 쾌감을

만끽했다. 서울고 선수들은 그대로 그라운드에 엎어졌다.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은 냉혹하기

그지 없다. 승부의 세계에 일찌감치 몸 담은 이들에게 야구는 기록의 경기가 아닌 정글의

경기이다. 그런데 잠시 후에 카메라에 잡힌 이형종. 그는 마운드 위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문득 애잔해졌다.

우승 세러모니가 펼쳐지고, 광주일고의 교가가 울려퍼졌다. 학교의 명예와 전통을 빛냈다

는 공식적인 언어들이 공허하게 곁들여졌다. 감독과 승리투수의 소감도 등장했다.

그때까지도 이형종은 울고 있었다. 소년의 눈물. 마운드에서 핑그르르 스핀 먹은 공이 공기

를 가르며 홈 플레이트를 향하지만, 6번 타자가 통타하는 결정적 장면이 이미 지나간 다음

에도 그의 모습이 다시 비쳤다. 어쩌면 그가 고교 야구를 살리고 있는지도 모를 장면이었다.

어쩌면 그가 이번 대통령배의 주인공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어가 울고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워서 인터뷰를 한 것은 그런 직감 때문이리라.

"...위기가 닥치면 마운드에 오른다고 감독님의 지시가 있었는데...(훌쩍) 오늘 공이 제대로

구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훌쩍)..."

소년은 연신 눈물을 닦으면서 괴로운 복기를 해야만 했다. 이 승부가 생의 가장 중요한 고비

라도 되는 것인 양. 학교의 명예와 전통을 떠나 소년의 부서진 몸이 흘리는 눈물은 이상한

감동이 있었다. 집단주의의 마력이 휘감고 있는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떠나 외로운 개별성의

작은 외침이 있었다. 말이 아니라 몸이 외치는 광경.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고교투수 정영일이 결승전에서만 무려 150여개의 공을 던지면서 상대

공격을 막다가 나중에 빈 몸으로 결승타를 내주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도 정영일은

울지 않았다. 단지 결과로 증언했다. 이형종은 결과는 같았지만, 증언이 아니라 순수한 극한

의 표현이 있었다. 극한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의 절망으로서 눈물. 그걸 공중파 TV가

생중계한다는 것이 잔혹 취미이기도 하다. 그것에 감동하는 시청자는 매조키스트이기도 하다.

그런 공모 속에서 이형종의 눈물이 반짝 했다.

http://blog.naver.com/erewhon/70017083239